수기집 그리고, 베를린에서 (파견학기: 2021-2)_최윤호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IME글로벌) 최윤호 학부생 20190290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4부작 미니 드라마로, ‘하시디즘’이라는 유대인 종교 공동체를 벗어나고 싶어, 베를린으로 도망친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가 보수적인 공간의 정반대편으로 상상한 공간, 그녀가 평생을 갈망한 자유로 상징된 공간이 베를린이었고, 나는 그렇게 베를린을 처음 만났다. 2021년 초 경주의 한 독립서점에서 ‘VENUE’라는 잡지 책을 발견했다. 세계 각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매거진이었고, 가판대에 걸려 있던 잡지의 주제 도시는 베를린, ‘가난 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 책을 펼칠 때 즈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은 순간에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후 갑자기 사라진 목적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된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은 현재에서 사는 방법을 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되고 싶은 나’를 쫓아가기에는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대학에서 1년 즈음을 보낸 뒤 어느 순간, 되고 싶은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정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나는 매 선택마다 아주 단순하게 내가 끌리는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선택 후에는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사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중 발견한 잡지 책에 담겨 있는 사람들은 내가 갈망하던 삶의 모습과 닮아 있었고,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이 곳에 가면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득 안고,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아직도 베를린에 도착한 첫 날이 생생하다. 9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쨍쨍하게 떠 있었고, 친구와 나는 짐을 얼른 기숙사에 넣어두고, 베를린이 한 눈에 보이는 산 중턱에 누워서 태닝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수영장이나 해변이 아닌 곳에서 맨 몸으로 누워 있었는데, 어제 해본 일인 듯 자연스러웠다. 영어로 이것저것 말하는 친구를 나는 절반 정도 알아들었고, 다 이해한 듯 그럴 듯하게 맞장구 치며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친구네 홈파티에서 ▲베를린 케밥하우스에서 베를린에 도착한 10일 정도는 기숙사 방문을 나서는 것이 두려워 방 안에 있거나, 허겁지겁 기숙사건물을 벗어나 혼자서 시내를 서성거렸다. 길가라면 모를까 기숙사는 교환학생들로 가득했고 태어나서 처음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나는 겁을 잔뜩 먹었다.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화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Hi와 Hello 사이에서 무엇이 더 적절한지를 멍청하게 방 안에서 고민하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사실 둘은 당연히 똑같다.) 또, 유럽 사람들은 영어 발음이 한결같이 전부 달라서, 프랑스 친구와 스페인 친구가 서로 영어로 대화를 하면, 나는 서로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일 즈음이 지난 금요일 밤, 더 이상 방 안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용기를 내 외국 학생들 틈으로 섞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7층이 소란스러웠기에 목적지로 정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문 앞에 바로 공용 공간이 있기 때문에 바로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안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20명 가까운 친 구들이 술과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또 잔뜩 겁을 먹은 나는 방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는 마침내 엘리베이터를 타 7층을 눌렀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어 울려 처음 클럽을 갔고, 우리는 매주 금요일 밤에 모여 새로운 클럽을 찾아 나섰다. 그 후 우리가 처음 만난 때에 대해 포르투에서 온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You seemed so arrogant when we met irst time on 7th, mate. You’ve never said ‘hi’ to anyone. The irst thing you asked was ‘can I get a cigarette’. I was thought in that time ‘what the hell is this prick’” (너 처음 7층에서 만났을 때 되게 오만해 보였어. 누구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고, 너가 처음 한 말은 담배를 한 개비 달라는 거였지. 나는 ‘이 **는 뭘까’ 하고 생각 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웠고, 지하철에서 있으면 문신을 한 사람이 안 한 사람보다 많았던 도시. 옷차림이 아무리 이상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지하철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길에서 애정행각을 벌여도 그 누구도 부담스러운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친구는 “어느 한 날, 코로나가 다시 심하게 번져 클럽들이 모두 문을 닫아서 우리는 스피커와 Dj키트, 싸이키조명을 들고 지하철에 타서 6번 노선을 클럽 노선으로 만들었지.” 하고 말했는데,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은 도시였다. “버스에서 크게 얘기하는 건 개인의 자유로 볼 수 있을까? 길가에서 담배는 펴도 되는 걸까? 지하철이 지금 20분이나 늦는데 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걸까? 마약을 하는 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 (독일에서는 소 량의 마약을 소지하고 소비하는 것은 기소가 자제된다.) 길가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개인의 의무일까? 벗는 것이 권리일까?” 내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통념과 상식들이 하나 둘 어긋나기 시작하고, 나는 그제야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alvarenga 친구네 별장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치로 허용하는 도시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거의 모든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충분히 자유로웠고 매거진을 읽으며 상상한 만큼 자유롭고 멋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크로이츠베르크의 한 술집에서 처 음 만난 Cas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갑자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베를린으로 왔다고 했다. 지금 이 애는 아프리카에 가있다. 항상 붙어 다니던 건축을 공부하는 Henrique는 인간은 국가와 도시가 아니라 거리와 건물에도 취향을 가질 수 있 음을 알려주었다. 스웨덴에서 온 Marcus는 자기는 열심히 일해서 다른 회사 좋게 해주기 싫다며, 대학 다니던 중에 회사를 세워 석사를 거의 다 마친 지금까지도 망하지 않고 자기 회사를 잘 굴리고 있다. 한국으로 이제 막 돌아온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질문하고 있다. 그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 멀리 그 곳까지 갔지만, 결국 그 답은 공간 따위를 바꾼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회와 나 사이를 끊임없이 타협해가며 그럴듯한 선택을 내려보려 애쓰고 있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오로지 ‘나’ 로 기울어진 선택을 하고 싶다. 베를린에서는 그런 선택을 해도 된다는 용기를 챙겨 온 것만 같다. ▲Marcus와 커피숍에서
수기집 자유와 다양성의 나라, 미국 (파견학기: 2021-2)_이화연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IME글로벌) 이화연 학부생 20170230 엄청난 포부를 갖고 미국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표면적인 나의 목적은 두 가지 였다. 영어 실력 늘리기와 외국인 친구 만들어 보기. 비행기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지구 반대편에 1년이나 머물기로 결심한 사유 치고는 꽤 단순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미국이 영어 배우기 좋으니까, 다인종 사회라 친구 만들기도 좋을 거야. 자유의 나라니까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사실은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그냥 멀리 떠나보고 싶기도 했다. 휴가 때마다 다른 나라로 떠날 정도로 방랑벽이 넘치던 나는 외국에서의 장기 거주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웃기지만 평소에 즐겨보던 미드 속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기도 했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여러 산발적인 이유들을 갖고 어찌 됐든 나는 들뜬 마음으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싣기로 결정했다. UIUC 에서의 등교 첫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각 국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위한 수업이 있었는데, 내가 수강한 클래스에서 30여 명의 학생 중 우연히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굉장한 이질감이었다 (물론 다른 Asian 국가에서 온 교환 학생들도 있었으나 같은 클래스가 아니었다). 심지어 같은 나라에 서 온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얘기를 하고 있었고, 대부 분이 유럽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내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모두의 어색한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무리들 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던 나는 조별로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 인사를 하는 시간에도 꿀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었다. “Hi, I’m Hannah and I’m from South Korea”. 이 이상 말을 이어 나갈 문장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관심을 갖고 10여년 이상의 시간동안 영어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굉장한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간단한 스몰톡도 이어나가지 못하는 나의 소극적인 모습에 자괴감이 크게 들었던 첫 날 이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앞으로 이 낯선 땅에서의 살길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나의 생존 전략은 하루도 빠짐없이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강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집 안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무엇보다 싫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조금 더 엄격해지기로 했다. 캠퍼스 내에서는 파티가 많이 열린 다. Frat Party, House Party, Club Party 등 호스트의 종류와 장소에 따라서 다양한 파티가 있고 학교 자체적으로 이벤트 또한 종종 열리는데, 이는 Socializing에 있어서 최적의 장소이다. 몇몇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가 미드에서 보는 파티들은 문만 열고 들어가면 환영해주는 모두를 위한 파티가 아니다. 위에 기술한 파티들은 Club Party(동아리에서 주최하는 파티)를 제외하고는 아파트나 하우스에 사는 친구들이 파티를 여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은 호스트로부터 초대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위 말하는 인싸가 되어야지 미국의 파티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기 수월 하다는 것이다. 웃기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주어진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다분히 인싸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으로 룸메이트와 함께 참가했던 Barn Dance는 간단히 말하면 다같이 버스를 타고 외딴 곳에 있는 곳간(?)으로 이동해 컨트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맥주를 마시는 행사이다. 나는 Pre-Game에서 술을 왕창 먹고 취한 상태로 버스에 올라타 취기를 빌미로 만 나는 모두에게 친근한 인사를 해대며 말을 걸었다. 사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과도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미국의 문화 특성 상 이는 크게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만난 독일인 Michael은 내일 본인의 아파트 루프탑에서 풀파티가 있다고 나와 친구를 초대하였고, 이때 처음으로 파티에 가보게 되었다. 독일인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대학을 다니는 이 친구의 지인들은 주로 오스트리아 친구들이었는데 이 인연으로 어쩌다 오스트리아 교환학생 무리에 끼어 유럽에서 온 친구들과 한 학기 동안 주로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학기 말에는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주최하여 60여 명의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첫번째 학기가 마무리되고, 두번째 학기에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친한 미국인 친구들을 사귀어 보고싶었다. 더불어 여러 국적으로 구성된 글로벌 그룹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유학을 가거나 교환학생 신분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하게 되면 주로 본인과 같은 처지에 처해있는 인터내셔널 친구들과 친해지기 훨씬 쉽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아도, 본인 살기도 바쁜 현지인이 언어가 완벽하 지 않은 외국인 친구와 각별해지기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어려 울 것이다. 또한, 인터내셔널 그룹 내에서도 주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같은 인종끼리 어울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민자 들로 구성된 미국 사회를 ‘Melting Pot’ 이라고 부르듯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멋있고 이상적인 사회라는 생각을 해왔던 사람이다. 이번 기회로 나의 이상을 실천에 옮겨보도록 했다. 우선 미국인 룸메이트 3명으로 구성된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헝가리, 독일, 터키, 프랑스, 인도네시아, 사우디 아라비아, 한국 등 다양한 국가의 배경으로 구성된 흥미로운 그룹을 형성하여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봄 방학에는 함께 여행을 갔고, 주말에는 함께 캠퍼스 내 Bar에 가거나 평일에는 각 주별로 나라별 테마를 잡아 함께 요리를 해먹기도 하며 가끔은 미국 룸메이트들을 초대해 함께 어울리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언젠가 미국인 룸메이트 친구가 나에게 “You it in America very well”(너는 미국 사회에 아주 잘 어울려) 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물론 생전 발을 디뎌본 적도 없는 곳에서 적응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보다는 해당 사회가 표방하는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즐기려는 마인드를 가지려고 노 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는가 싶다. 누군가 미국의 어떤 점이 가장 좋느냐 물을 때 나는 미국의 “자유”가 좋다고 대답하곤 했다. 이 곳에서는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 ‘너’ 와 ‘나’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립된 객체로서 타인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남들 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선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을 남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 곳에서 날 것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 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등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친구들과 함께 Nashville로 로드 트립을 떠났을 때였다. 네쉬빌의 밤 거리는 화려했고, 행인 하나 없는 새벽 거리에서 우리는 마치 거리를 접수한 듯이 굴었다. 한 손에는 미국 성조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맥주 캔을 쥔 우리는 주제곡을 부르며 거리 곳곳을 뛰어다녔다. 그 때 나는 이 젊음의 패기로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이라는 낯선 땅을 밟고 온 후와 이전의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 사람들을 대하는 Attitude, 자신감의 정도, 심지어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미의 기준 또한 변화해 있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를 둘 러싼 세계의 변화가 나의 자아에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이래서 젊을 때 밖으로 나가보라는 말을 하는 거구나 싶었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선물 같은 시간들은 나에게 당연하게 느껴져 왔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고, 자유라는 가치 속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주었다.
수기집 내가 사랑한 도시, 오스트리아 레오벤 (파견학기: 2020-2)_오유정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IME글로벌) 오유정 학부생 20170215 인천공항으로 떠나기 하루 전, 뒤척이다 잠에 채 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기억이 난다. 나는 환경의 변화를 통해 비로소 내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는 곳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시간을 달리 쓰는 경험을 특히 소중히 여겨왔다. 때문에 평소라면 새로운 곳에 간다는 생각에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겠지만, 이번엔 당장 기대보다는 코로나와 인종차별에 대한 불안이 앞섰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 하는 시기에 익숙하고 안전한 환경을 벗어나 오스트리아로의 단기유학을 택하는 것을 걱정하고 또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들을 설득한 나 역시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졸업 전 학부생으로서 유학을 경험할 수 있는 마지막 학기였고,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를 완전히 다른 사회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 학기를 머무른 도시 레오벤은 University of Leoben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구 약 25,000명의 한적한 소도시이다. 도심을 둘러 강이 흐르고 강을 둘러 산이 나있고, 그 안엔 저마다의 아름다운 마당을 가꾸는 주택과 낮은 층의 신축 건물이 듬성듬성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환학생을 많이 오는 지역은 아니어서 평소에도 연 1~2명의 아주대, 포항공대 학생을 제외하고는 한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코로나의 여파로 아시아권 교환학생은 혼자 밖에 없었는데, 외국인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능동적으로 다가가기는 두려운 나같은 사람에게 조금은 고생스러우면서도 단기간에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University of Leoben은 석유공학과 광물자원공학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이다. 때문에타 학과의 과목 역시 광업과 에너지에 관련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과목으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과 대두된 역사적 배경, 향후의 방향을 에너지와 관련하여 공부하는 Sustainable Development: History of thought가 있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단편적으로 환경 오염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한 엔지니어로서의 자세를 고민해볼 수 있었다. 매 수업 교수님께서 생각해볼만한 화두를 던져 주시면 며칠 뒤 토의하는 세션이 개최되었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서로의 의견에 반박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거나 새로운 화두를 이끌어내고는 했다. 레오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공간은 기숙사와 그 근처의 산이다. 기숙사에는 여러 나라의 학부 및 석박사 교환학생과 타지 출신의 오스트리안이 함께 살았는데, 두 달 반 남짓한 대면수업에서 만난 여럿의 친구들과 같은 기숙사에 머물며 요리하고, 파티하고, 취미 생활을 공유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친한 친구들과 기숙사 그룹을 만들어 주위의 산과 자연공원을 하이킹했다. 일정이 있을 때면 기숙사 전체 단톡방에 올려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하곤 했는데, 처음에 6명으로 시작한 그룹이 학기말에는 기숙사에 1/4에가까운 인원이 함께할 정도로 많은 사생이 새로운 만남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가지각색의 출신, 나이, 종교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다양한 친구들을만날 수 있었다. 여전히 내전 중인 예멘의 친구와는 남한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전쟁의 아픔에 대해, 늦은 나이에 박사 공부의 길에 오른 37살 친구와는 변화할 미래와 과학 기술에 대해, 무슬림 친구와는 이슬람과 여권에 대해,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서로의 궁금증을 묻고 답하였다.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격 없이 대화하며 나 역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점점 편해졌고 어느새 우리는 가까운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겪어보겠노라 다짐해왔음에도, 친구라 칭하며 자유롭게 생각을 공유하는 사이는 결국 나와 굉장히 닮은 집단에 국한시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평소 운동을 즐기지 않는 내가 레오벤에서 하이킹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도 내게는 특별한 관계였던 이들의 영향이 컸지 않을까 싶다. 팬데믹으로 인해 유럽 현지에서의 생활에는 크고 작은 제약이 따랐다. 봉쇄 기간에는 음식점, 숙박 시설, 박물관, 영화관 등 여가문화시설의 이용이 제한되었는데, 이따금씩 유럽 전역에서 이러한 봉쇄 조치와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유럽 깊숙이 자리잡은 자유주의 관점에서 이는 비단 마스크를 쓰고 벗는 것의 문제를 넘어, 공익을 앞세워 정부가 개인의 신체적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사적인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기 위해 타인의 건강에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우리나라 역시 공권력에 의한 박탈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숙고해볼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신을 위한 덕목으로 지금까지의 상식을 버리고 당연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든 상식을 의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에, 다양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의심이 필요한 상식과 그렇지 않은 상식을 구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기유학은 의심이 필요한 상식의 구분을 위한 좋은 발판을 제공하는 것 같다. 다른 문화권에서의 경험을 통해 평생 당연하고 올바르게 여겨졌던 것들이 실제는 특수한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 만들어져 사회적으로 학습된 가치임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인한 격변의 시기에 한국과는 다른 유럽의 대처 방식을 보며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예전과 같이 책과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관심의 방향과 정도가 다양하고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내가 직접 보고 듣지 못하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내가 잠시나마 머물렀고 사랑했던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것이니까 말이다.
수기집 교환학생을 다녀와서 (파견학기: 2019-1)_장한결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현은장학금) 장한결 학부생 20140636 사실 교환학생 도전 결정은 쉽지 않았다. 교환학생 지원서를 작성할 즈음 주변 친구들은 대학원 원서를 준비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환학생까지 다녀오면 진로 결정에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 라는 고민도 매우 컸다.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하지 않으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도전을 하였고, 도전을 마무리한 지금 그 결정에 대해서 정말 만족하고 있다. 내가 다녀온 학교는 싱가폴의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이하 NUS)이다. NUS를 선택한 이유는 꽤 단순하다. 영어를 쓰면서 치안이 안전하고 유럽보다 부담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싱가포르로 출국을 하였는데, 첫 인상은 깨끗하고 덥다는 인상을 받았다. 같은 아시아권 국가였고 한국에서만 50명의 교환학생이 함께 와서 적응은 힘들지 않았다. 기숙사는 큰 한방에 4개의 개인 방이 존재하고 거실과 주방을 공유하는 시스템이였다. 운이 좋게 4명 모두 한국인이여서 교환학생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수업은 경제학 과목 3과목, 중국어/싱가포르 과목 2과목을 수강했다. 포스텍을 다니면서 공대만이 아닌 종합대의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 쉽게 접할 수 없고, 평소 관심 있었던 경제학,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과목을 수강했다. 수업 스타일은 역시 참여 위주의 수업이었다. 4학점의 강의라고 하면 2시간은 교수님 수업, 1시간은 조교와 학생만 참여하는 튜토리얼 수업이다. 교수님 수업이라고 해도 일방적인 수업이 아닌 학생과 쌍방향 소통을 중요시하였다. 튜토리얼도 학생 주도하의 토론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 외적으로 교환학생의 가장 큰 장점은 2가지라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자기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교환학생의 특성상 우리 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학업의 부담감이 그리 심하지 않다. 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큰 부담 없이 학생의 신분으로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없다.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기면서 지금까지 삶에 대한 생각,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특히 NUS의 경우 기숙사 앞에 town green과 ininite pool이 있어서 교내에서도 충분히 리조트에서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같이 교환학생을 온 한국인 친구와 외국인 친구들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이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 나누며 적응한다면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 두번째는 주변 국가로의 여행이다. NUS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1주일 전부터 수업을 하지 않는다. 교환학생을 온 학생들에게는 이 때가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다. 더불어 싱가포르는 동남아 가운데 있어 왠만한 동남아 국가 항공권이 매우 싸다. 가끔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혹은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홀로 떠났던 인도네시아 바탐섬 여행이다. 싱가포르에 서 50분정도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섬인데, 사람이 정말 없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town green에서 프리즈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석양을 바라보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하루하루 내일의 걱정, 진로의 고민이 아닌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생각만 했다. 막학기를 앞두고 있는 와중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번은 외국인 친구와 삼겹살을 먹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와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하지만 짧은 역사 지식과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우리 나라의 역사를 정확하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정말 아쉬웠다. 이런 점을 못한 점이 교환학생 중에서 가장 아쉬운 시간이다. 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교환학생 생활이 정말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경험이다. 타 학교를 보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해도 쉽게 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타 학교보다는 합격률이 높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산업경영공학과 모든 학생분들이 경험해보았으면 좋겠다. 교환학생 내에서의 첫 비행기 착륙부터 교환학생을 왔다는 경험, 새로운 친구, 새로운 음식 그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꼭 모든 학생들이 포스텍 생활에서 벗어나 위와 같은 경험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수기집 기본을 쌓는 과정 (파견학기: 2019-1)_이관희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IME글로벌) 이관희 학부생 20160174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산업경영공학과에 재학 중인 16학번 학부생 이관희라고 합니다. 저는 올해 1학기에 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UIUC)에서 해외단기유학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단기유학 프로그램을 더 수월하게 이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학과 내외의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제 해외단기유학 경험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기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내가 가진 경험과 문화를 나누고, 그들과 서로 조금은 다른 사고관과 문화를 두고 토론하는 활동을 중요히 생각했고, 소홀히 하지 않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산업경영공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프로그램에 지원한 순간부터 새로운 학기를 앞에 두고 있는 지금까지, 그동안 제가 가장 공들였던 일은 저 자신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본을 다지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글을 통해 그 과정 동안 UIUC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변화조차도 잘 추구하지 않던 제가 단기유학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3학년 봄 학기가 서서히 끝나갈 때쯤 “언제 졸업하는게 나을까?”, “앞으로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와 같은 어려운 질문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좀 더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최대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해 보면서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때가 아니면 단기유학 프로그램을 가보기 힘들겠다는 생각과 맞물려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글이 게재될 이 IME Newsletter 역시 단기유학 지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학과 생활을 이야기할 때, IME Newsletter는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석학 분들과의 인터뷰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017년 10월, 저는 Gérard P. Cornuéjols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위해 미국에 있는 손꼽히는 명문 대 중 하나인 Carnegie Mellon University(CMU)에 방문했었습니다. 교수님과의 인터뷰나 동문 선배님과의 인터뷰 등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도 많이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하게 놀라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방문 기간 중 학교 밖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그 곳에서 연구에 한창 바쁜 듯한 학생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나서 처음부터 서로의 연구와 공부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제안하는 모습이 평소에 그런 대화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잘 그리지도 못했던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 속으로 연구와 공부가 자연스럽게 들여온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경험과 환경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알고 싶었고, 그때부터 외국에서 잠시라도 대학생활을 하면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UIUC에서의 교환학생 생활이 가진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재학생과 거의 동일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상생활 측면은 물론이고 학부 과정에서 제공하는 수업 수강의 폭에 거의 제한이 없었고(일부 대학원 수업과 Business 관련 과목 제외), 수업 내에서 교환학생이어서 다른 점이나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 덕에 학업 관련 분야에서도 똑같은 환경에서 몰두해 공부할 수 있었고, 그룹을 만들어 공부하며 서로 교과목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에서 수강한 수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최적화 분야 전반을 깊이 있게 다루는 수업이었습니다. 이 수업은 학부 생과 대학원생 모두 집중하여 수강한 수업이었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기에 가장 적절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매주가 지나면 그 주에 다룬 내용과 관련된 예제들을 만들어 수업 웹페이지에 공유해 주셨는데, 답이나 풀이를 따로 만들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제를 해결하는 것은 숙제의 일부가 아니었기에 지나치기 쉬웠지만, 해결하지 못한 부분들이 몇 있어 직접 메일을 보내 교수님의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말씀드리자, 가장 처음으로 이렇게 저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좋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교수님께서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놀라기도 했지만, 그러한 질문을 받는 것은 더욱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당황이 섞인 어색한 침묵을 잠시 보내고 난 뒤, 끝까지 도달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본 몇 가지의 풀이 과정들을 시작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토론 중 교수님께서는 때로는 풀이를 위한 직접적인 방향을 잡아 주시기도 하시 면서 즐겁게 토론을 이어 나가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강의 중 틀린 점이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달라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올 때, 단기유학 지원시에 가졌던 궁금증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라는 질문에는 제가 가지고 있던 불안함이 담겨 있다는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괜찮아 보이는 분야를 찾고 수동적으로 공부하려 하지는 않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우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할 것을 계획할 때에, ‘무엇을 한다’ 보다 ‘어떻게 한다’에 의미를 더 크게 두고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매 순간 우리의 행복과 성취감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강의로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내가 어떤 생각과 자세를 가지고 공부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저는 품질관리(Quality Management), 신뢰성 공학 (Reliability engineering), 비선형 계획(Nonlinear programming) 등 4개의 수업을 더 수강했습니다. 각 수업은 분명히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었고, 그 내용들이 수강신청 당시에는 흥미로워 보이긴 했 지만, 당장 제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수업은 내가 능동적으로, 즐겁게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토론을 먼저 시작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을 친구와 나누기 위해 말하면서 정리해 보고, 마지 막에는 피하고 싶었던 영어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발표까지 해보면서 다양한 시도를 학기 동안 잊지 않고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공부했던 것들이 서로 잘 연결되고 조금은 더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더 어려운 주제들까지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UIUC에서의 한 학기는 대학 생활 막바지에 있는 짧은 한 학기였지만,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을 체험하며 느낄 수 있었던 귀중한 학기였습니다. 단기유학 프로그램은 매 순간이 이제껏 해 본 적 없던 것들을 해보고, 본 적 없던 것들을 보고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내게 익숙한 곳 밖으로 나가는 일과 전혀 접해 본 적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제가 가진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고 떠난 단기 유학이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이것도 못할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먼저 즐겁게 시작하고 생각하는 경험은 향후 귀중한 자산으로 쓰이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이 기회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기집 스웨덴에서 찾은 행복의 의미 (파견학기: 2019-1)_신지현
구분 성명 학위과정 학번 해외단기유학(IME글로벌) 신지현 학부생 20160173 출국 당일 날까지도, 심지어는 14시간의 비행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작은 린셰핑 공항에서 하나뿐인 컨베이어 벨트 위의 큰 캐리어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서는 순간, 하얗고 깨끗한 눈밭은 나의 설렘 그 자체였다. 그제서야 나는 실감했다. ‘아, 이 곳이 5개월 동안 내가 살아갈 북 유럽이구나!’ 생각보다 적응은 힘들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만 쭉 해와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것을 크게 어렵게 느끼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탈리아에서 온 석사 과정의 외국인 친구 Eugenia와 함께 방을 쓴 다는 것이었다. 적응이 힘들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단기유학을 간 학기에 다른 한국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그동안 많아봤자 7명 정도였는데 그 학기에는 무려 13명이나 있었다. 내가 막내였는데 언니, 오빠들과 이토록 친해질 줄 처음에는 몰랐다. 린셰핑 대학에서의 생활은 포스텍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스웨덴에는 스톡홀름과 같이 아주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외식이라는 문화가 아예 자리 잡지 않아서 모든 학생들이 요리를 하여 끼니를 해결하였고 수업이 있는 날에도 항상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요리에 관심은 많지만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요리를 시작하기에 딱 맞았다. 심지어는 오븐도 주방에 두 개나 있어서 첫 달은 요리 도구와 베이킹 도구를 구경하고 사는 것이 하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기숙사는 학교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는데 정말 모든 학생들이 하나 이상의 자전거를 가지고 있어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래서 학교 캠퍼스는 항상 수천 대의 자전거로 꽉 꽉 채워져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전혀 타지 못했는데, 아침 8시 15분에 시작하는 수업은 불과 며칠 만에 나를 꽁꽁 언 빙판길 위에서도 패달을 죽어라 밟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침 8시 15분이 1교시인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1교시 수업을 넣지 않으면 되는 문제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린셰핑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이 시간표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시간, 다른 강의실로 배정되어 있어 매주 시간표를 새로 확인해야 했다. 또 다른 충격은 오후 3시가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하더니 3시 반에는 완전히 깜깜해져서 가로등이 켜지지 않으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해가 너무 짧은 덕분에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많다던데 나는 깜깜한 밤에 팡팡 내리는 새하얀 눈이 너무 좋았으며 새 친구들을 사귀느라 바빴던 가장 행복하고 긴 밤이었다. 가장 큰 충격은 교실 안에서 받은 충격이었다. 내가 들은 수업 중에 ‘Digitisation, Business Ecologies and Business Models’라는 수업이 있었는데 매주 4~5편의 Article이나 짧은 논문 혹은 동영상을 보고 토론을 하는 수업이었다. 총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란 책상에 5~7명씩 앉아 토론을 했다. 학생들의 수업 태도는 정말 자유분방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꼬고 등을 뒤로 눕힌 채로 교수님과 토론했고 냄새가 심하게 나지 않는 도시락을 눈치 보지 않고 먹었다. 교수님의 말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있게 ‘No’를 말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 있게 설명했다. 교수님께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학생들의 말을 모두 귀담아 들어주셨고 그것에 대해 동의를 표하거나 다시 조리 있게 반박하셨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자신있게 말하는 학생들이 부러웠고 그런 학생들을 존중하며 대화하는 교수님이 존경스러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권력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고 권위적인 면들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더불어 나의 영어 실력 때문에, 발음 때문에, 서양인들이 아시아의 기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까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다른 학생들이나 교 수님의 유창한 질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고 있던 내가 문득 부끄러워지는 시간이었다. 배움과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자세는 내가 단기유학 중 가장 잘 배운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단기유학 중 유럽여행은 많은 다른 학생들에게 그렇듯이 내게도 큰 로망이었다. 그런 면에서 린셰핑을 택한 것은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흔히 북유럽에 가면 유럽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어 여행을 다니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라이언에어와 같은 저가 항공이 잘 되어 있어서 시기만 잘 맞추면 아주 싸게 여행을 갔다 올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점은 한 학기가 중간고사 전후로 나누어진 우리나라의 학기체제와는 달리 완전히 다른 2개의 period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period에서 들은 수업 은 두 번째 period가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종강을 한다. 나는 1월 중순에 개강하여 3월 말까지 있는 첫 번째 period에 최대로 수강 가능한 4개의 수업을 꽉꽉 채워 듣고 두번째 period에서는 수업을 딱 하나만 듣도록 수강신청을 하여 따뜻하게 날이 풀릴 즈음에는 여행을 꽤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겨울에는 딱 한 번 여행을 갔는데 학교의 학생단체가 주관한 오로라 캠프였다. 스웨덴의 가장 북쪽 ‘키루나’라는 지방에서 3박 4일간 진행되었다. TV의 다큐멘터리 방송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정말 희고 깨끗한 눈밭과 쏟아져 내리는 별빛은 한밤중의 추위도 잊고 맥주를 들이켜게 만들었다. 오로라는 오로라 지수가 강하고 구름이 아예 없어야 관측이 가능한 데 첫째 날과 둘째 날 밤 모두 구름이 많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낮에 눈이 펑펑 내리길래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마법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깨끗해지더니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오로라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추운지도 모르고 넋 놓고 바라보던 그날 밤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는 외국에서 잠깐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는데 스웨덴으로의 단기유학을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일단 치안이 좋은 편이라 밤에 산책과 같은 혼자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었고 크고 깨끗한 자연은 학업에 지친 내 마음을 달래기에 아주 좋았다. 스웨덴 사람들은 ‘라곰’ 이라는 개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라곰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술은 즐기되 취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지 않는다. 거친 밥을 먹고 맹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베어도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중용과 비슷한 개념이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와 행복이 묻어난다. 린셰핑에서 수업을 마치고 룸메이트와 맥주를 한 캔씩 챙겨 기숙사 뒤의 숲속에 산책을 갔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벤치에 앉아 홀짝홀짝 마시며 떠다니는 구름과 울창한 소나무들을 보았을 때 문득 행복을 느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언제 행복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목표한 무엇인가를 이루어 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을 때가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는 무엇인가를 해냈을 때 행복했는데 스웨덴에서는 존재 자체로 행복함을 느끼게 되었다. 라곰은 나의 행복의 기준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매일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고 친구들과 커피를 마신 것, 저녁에는 다른 나라 친구들을 초대하여 서로의 음식을 대접한 것 모두가 나에게는 소소한 행복 그 자체였다. 누군가가 단기유학에 대해 물어본다면 정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꼭 가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기타 [장학금 수혜 스토리] SK hynix Fellowship 이종민 (산업경영공학과 13학번)
SK hynix Fellowship 이종민 (산업경영공학과 13학번) 장학금 수혜 스토리 처음 이 장학금에 대한 공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의아했었다. 예전부터 동경해 왔던 기업인 SK, 그리고 반도체 산업의 큰 발전을 이룩한 Hynix에서 장학생 모집을 한다고 했다. 내가 그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격 요건이 되었기에 일단 지원을 하였다. 사실 학기 중에 예비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고, 포스터 발표를 한다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학금의 의미보다도 교수님들 앞에 서보고 나의 관심 분야를 보여주는, 도전의 의미로서 나는 이 장학 프로젝트에 신청을 하였다. 당일 매우 떨리기도 하였고, 대학원생 선배님들의 엄청난 연구 내용에 비해 초라해 보였지만, 그것이 나에게 더 열심히 학업을 정진해야겠다는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SK Hynix Scholarship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으로 감사했다. 장학금을 주신 기업 SK Hynix에도 감사했고, 이 기회를 제공한 POSTECH과 지도해주신 교수님들께도 정말 감사했다. 이 기회에 대한 최선의 보답은 내가 학업을 더 열심히 하여 좋은 연구결과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학 혜택을 많은 학생들이 받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사람, 그런 기업을 돕는, 아름다운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